2022. 5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도로시 살롱

이민정 LEE Min Jung 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2020 년 11 월, 영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행사에서였다. 그 행사에 그를 만나러 갔던 것은 아니다. 도로시와 인연이 있는 몇몇 작가가, 그리고 지켜보고 있는 작가 몇몇이 입주하여 있었기에 그들의 작업을 보러 갔었다. 그러니까, 이민정 작가와의 만남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그 많은 영은 입주 작가들 중에서 특별히 보려고 했던 작가는 아니었던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취향과 작가 선택 방법을 잘 파악하고 있는 P 작가 덕분이었다. 이듬해 도로시 살롱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열심히 보여준 후 옆방 작가의 작업이 재미있다며 나를 이민정의 작업실로 이끌었다. 

P 작가의 생각은 옳았다. 무채색을 주조로 간간히 세련된 파스텔조의 따뜻한 색이 비치는 이민정의 추상(抽象)은, 첫눈에 꽤나 매력적이었다. 처음 작업을 대할 때 선입견 없이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늘 그랬듯 몇마디 묻지 않고 슬쩍 그의 작업을 훑어 보았고, 그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단편적인, 그러나 나로서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정보를 꼭꼭 입력하고 그 방을 나왔다. 물론, 다음 개인전은 언제로 계획되어 있냐는 질문도 잊지 않았다. 도로시에서 한 번 같이 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뒤로 하고.

그로부터 7-8 개월이 지난 작년 6 월, P 작가의 개인전을 보러 이민정이 도로시 살롱을 찾았다. 전시장에서 다시 만난 작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작업 근황과 전시 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매력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가 의외로 아직 개인전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 20 년 12 월 영은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레지던시 보고전 이후, 새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그는 조용히 홈페이지 주소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매력적인 그의 작업과 다시 만났고, 2 개월 후 그의 작업실을 정식으로 방문한 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해 개인전 일정을 확정했다. 2020 년 11 월 첫 작업실 방문, 2021 년 6 월 작가의 갤러리 방문, 8 월 작업실 방문, 그리고 2022 년 5 월 개인전 개최. 생각해보니 이렇게 빠른 속도로 한 작가와 개인전을 진행하기로 확정한 것은 2018 년 여름에 만나 2019 년 10 월 전시 진행을 확정했던 윤정선 개인전 이후 처음이다. 대개는 여러 작가와 함께 하는 기획전(그룹전)으로 시작하여 작업과 일하는 방식을 살피고 서로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되었을 때 개인전을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었을 만큼, 이민정의 작업은 매력적이었고, 그의 진지한 태도는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이력을 살펴 볼 때 다시 개인전을 할 시점이 도로시에서 제안할 수 있는 일정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도 물론 한 몫 했다. 속된 말로, ‘아다리’가 잘 맞아떨어졌다.

이민정은 추상 abstract 작업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추상을 어려워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추상을 좋아한다. 추상화 전시를 준비할 때 마다, 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갸우뚱 거리며 전시장을 휙 돌고 당황하며 나가버리려나. 분석하고 비평하기 좋아하는 평론가와 기획자, 작가들은 얼마나 도끼 눈을 뜨고 작업을 날카롭게 바라 보려나. 그런데, 그 어렵다는 추상화로 개인전을 준비하며, 이민정은 <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이라는 시적이고 철학적인 제목을 제안했다. 이 제목은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의 책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4)는 프랑스 유학시절보다 한국 와서 더 많이 이름을 들은 학자다. 고백컨데, 미술이론 – 미술사를 전공했지만 나는 메를로-퐁티의 저서를 아직 읽은 적이 없었다. 어윈 파놉스키 Erwin Panofsky 의 도상학이나, 하인리히 뵐플린 Heinrich Wölfflin 의 미술사 방법론, 프랜시스 해스켈 Francis Haskell 의 역사와 이미지,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의 아비투스 habitus 같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열심히 공부했는데, 메를로-퐁티에 대하여서는 스치듯 지나간 기억이 전부다. 아마도 현대미술이론과 미술사의 접근 방법과 연구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려니. 그래서 이번 기회에 메를로퐁티를 한 번 읽어보았다. 어려운 책 일수록 번역서보다는 원서가 명료함을 알기에 원서를 구해 읽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번역서를 읽었다. 그리고, 역시나, 좌절했다. 회화를 논하는 이 철학서는 정말, 쉽지 않았다.

이민정 개인전<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을 보며 지적 호기심에 메를로-퐁티의 < 눈과 마음 >에 도전하실 분들께 미리 안심시켜드린다. 남부럽지 않게오랜 시간 한국과 프랑스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 책, 녹녹치 않았다. 어쩌면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l’œil et l’esprit, 그리고프랑스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 탓에 더욱 그랬을런지도 모르겠다. œil 를 눈이라고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은 이해가 갔는데,esprit 는 왜 마음으로 번역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이 단어의 합당성을 납득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L’Œil et l’Esprit 는 이해가쉬었는데, 눈과 마음으로 대입하면 무엇인가 석연치 않았다. 프랑스어로 esprit 는 영어와 같은 단어이다. 보통 우리가 esprit 라고 하면 마음보다는정신이나 영혼을 더 많이 이야기 하지 않던가. 역자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를 마음으로 번역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아시겠지만,대문자로 쓰는 눈 L’Œil 과 마음 l’Esprit 는 소문자의 눈 l’œil 과 마음 l’esprit 과 뉘앙스가 다르다. 정관사가 있고 없고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역자 또한 역주로 깨알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 수록, < 눈과 마음 >보다는 < 눈과 정신 >이 더 원 제목의 의미와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커졌다. 내게 ‘마음’이라는 단어는, 어떤 정신(인식과 사유)적인 것 보다는, 심적인 것, 감정적인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마음’의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마음 [명사] 1.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 2.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작용이나 태도. 3. 사람의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이나 위치.

아, 그랬었다. ‘마음’은 이렇게 많은 뜻을 지니는 단어였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메를로-퐁티가 이야기 하고 싶은 l’Esprit 는 정신이나 영혼보다는, 마음에 더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 말의 단어를, 나도 모르게 축약하고 한정해서 쓰고 이해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되는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림을 볼 때, 회화를 대할 때, 미술 작품을 대할 때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작은 실수 또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가지고 있는 지식, 경험 안에서만 보려고 애쓰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안에 대입하려고 애쓰는 그런 태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화를 보면서 내가 아는 것안에서 이해하려고 하니 ‘닮은 것’, ‘닮은 느낌’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고, 그러니 당연히 추상화는 어려울 수 밖에 없고 이해가 안 갈 수 밖에 없다. 추상화는‘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 순수한 점, 선, 면과 색채의 표현을 목표로’ 하는 그림인데 말이다.

<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을 읽는 과정은 내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지만, 책의 내용 자체는, 작가의 사유 자체는 잘 납득이 안되고 동의할 수 없는부분들이 많았다. 책을 빌려준 이민정 작가는 수많은 밑줄을 그어가며 이 책을 읽었던데, 미술사 전공자로서, 현대미술전시 기획자로서, 그리고현대미술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스트로서, 1964 년에 쓰여지고 출판된, 60 여년 전 20 세기 전반을 살다 간 철학자의 예술에 대한 철학서는 그다지 와 닿지않는 내용들이 많았다. 회화는 이래야 한다, 예술가는, 화가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단정들은 21 세기를 1/5 이나 넘기고 있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그닥 와 닿지 않는 내용들이더라(물론, 내가 불완전하게 읽고 이해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한가지, 보는 것에 대한 사유, 눈과 몸에 대한 사유, 인간이눈으로 보지만 결국 나 자신을 보려면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본다’는 행위의 불완전성, 가능하지만 불가능하고,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시지각, 시각적 인식에 대한 사유는 명료하지는 않아도 얼핏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것 듯 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모를 것 같기도 한, 정확하게이해되지는 않지만 어떤 이야기인지는 대략 알 것 같은 그런 이야기. 그리고 이 경험은 우리가 추상화를 볼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 그런 인지, 그런인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불완전 한 것 같지만 또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공감이 갈 것 같기도 한, 정확하게무엇일 이유는 없지만 또 정확하게 어떤 무엇일 수도 있는, 모호하면서 명료할 수 있는 추상화. 눈으로 지각하지만 마음(정신)으로 인식해야하는 시지각,시각적 인식은 곧 추상화를 그리는 행위와 감상하는 행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전시를 준비하며 읽었던 이민정의 초기작업노트 구절이 떠올랐다.

한 시인의 정수(精髓)가 시작(詩作) 그 자체보다 부지불식간에 축적해 온 시심(詩心)이라고 한다면,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 작업에 임하게 하는 일정 강도의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 이 존재 할 것이다.그런 마음은 외부 환경이나 사물에 감흥 함으로써 형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또는 빈 화면을 대했을 때 즉흥적으로 일어나는점, 선과 같은 그림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에 대한 흥미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나의 경우는 후자라고 볼 수 있는데 빈종이나 하얀 캔버스 화면을 대했을 때나의 감수성이 제약 없이 방출되는 순간들을 즐기는 것이다.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이런저런 형상에 어떤 의미가 오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심지어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으며 그림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내가 대결하고 싶은 세상을 캔버스 화면으로 축소하고 나의 마음이 아는 형태들과나의 마음이 아직 알지 못하는 형태들이 등장하고 지워지는 과정 속에서 생긴 필연적인 형상을 찾으려고 한다.다르게 말하면 어떤 제약을 두지 않고 그린다고 스스로에게 가정하고그리는 형상들과 또 그림이 그림을 그리는 그림의 준 자율성적인 상태가 만들어내는 형상들이 섞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2007. 12. 개인전 < 아름다운 분기점 beautiful junction > 작업 노트 중에서

그로부터 15 년이 지난 오늘, 그의 작업 노트는 조금씩의 변화가 있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그 결을 이어가고 있다.

(…)
식빵에 잼을 바르는 기분으로 그리기.
(…)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것이 나에게 1 순위의 어떤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캔버스의 크기는작아졌고 그림의 단계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과정이 드러나는 그림이 되었다. 색깔을 추구하면 형태가 약해지고 형태를 추구하다보면색깔이 단조로와진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고정된 것과 변하는 것이 다 드러났으면.

2022. 4. 작업 노트 중에서.

빈 캔버스 앞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인지한 것을 다시 몸으로 그려내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 화가. 그리고 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순수하게 점, 선, 면의 색채 표현에 열중하는 그림, 추상화. 프랑스가 낳은 세기의 지식인, 대철학자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이 잘이해가 안될지라도, 우리는 이민정이 그의 그림을 선보이며 왜 < 눈과 마음 >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는지 이제 십분 이해되기 시작한다. 눈으로 본 것을마음으로 담아 기억하고 이를 다시 마음에서 꺼내어 눈으로 보며 손으로 그리는 그림. 이민정에게 눈과 마음은 < 보다 >와 < 생각하다 >이고, 그 안에는 우연과필연, 무의식과 의식, 의미와 무의미가 공존하고, 부정형과 정형, 완전과 불완전, 정적인것과 동적인 것들이 공존한다. 그림을 잘 그려 미대에 들어갔지만,‘닮게 그리는 것’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이민정은 그렇게 보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보면서 그의 몸으로 – 손으로, 그리고 눈으로 그의 기억 속의심상을 더듬어 점과 선, 그리고 면이 만드는 색채와 형태로 표현해낸다. 그 안에 그가 담은 의미는, 무의미는 때로는 의식적이고 또 때로는 무의식적이다.그렇게 작가가 눈과 마음으로 만들어낸 그림 안에서 각자가 느끼고 또 찾아내는 의미와 무의미, 형태와 색채는 세련되고 감각적이어서 매력적이다. 그렇게우리의 눈과 마음이 그의 그림을 통해, 이민정 LEE Min Jung 의 <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을 통해 다채롭고 풍요로와진다. 메를로-퐁티가 회화를논하며 이야기 하고 싶었던 <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은 이런 것이었을까.

■ 임은신
2020. 12 상기하다 reminiscence, 영은미술관

이민정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 하나 한정지어 놓지 않고 변화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 무엇을 그릴 것인지를 미리 계획 하지 않고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그리기에서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장점은 과정의 시행착오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작가는 우선은 그리기를 시작하고, 진행하며 떠오르는 생각이나 외부로부터의 자극의 변화 등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 과정을 즐긴다.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하는 작업이지만, 전시장에서 보여 지는 완성된 작품들에게는 공통된 무엇인가가 보인다. 이렇게 보이는 형태는 대부분 원이나 수직, 수평선, 원통형 같은 기하학적인 요소이다. 이런 조형적인 요소들은 캔버스 안에서의 질서를 잡아주는 요소가 되는 동시에, 화면을 자유롭게 운용하면서도, 한편 질서를 바라는 작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추상회화 속의 어느 정도의 이런 형태는, 무엇이다, 라고 지시해 주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에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는 부분도 있고 어떤 사건과도 같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황에 이끌려 만들어 가기를 원하는 부분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 축적된 감각으로 화면을 운용하면서도 어떤 새로운 표현에 대한 가능성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화면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가는 모습과도 닮아있는데 과거의 기억과 경험으로 오늘을 살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와 계획으로 또 하루를 열어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한 화면 안에는 나의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가 응축되어 있다.” < 작가노트 중 >

작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 기억, 생각 등과 외부에서 받는 인상들을 내면의 이미지로 재구성해서 캔버스에 그 변화의 과정을 기록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업실과 집을 오가며 하늘에서 보게 되는 구름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업한 연작을 볼 수 있다. 구름이라는 것은 하늘위에 변함없이 멈춰있는 듯 있지만, 항상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속성을 갖고 있어, 하나의 캔버스 안에서조차 변화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업하는 작가의 조형언어와 닮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질 작업들의 큰 모티브는 구름과 같이 비정형적이고 유동적으로 보이는 형상과 그와 대조적인 수평 , 수직적인 구조의 조화이다. 그런데 조화를 위한 조화라기보다는 상충하는 감정과 생각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 조화라고 할 수 있겠다.“ < 작가노트 중 >

이민정 작가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음 그림에서는 좀 더 괜찮은 것이 나올거야’ 라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계속 나아지고 발전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계속 나아질 수 있다는 그리기의 과정이 갖고 있는 속성은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전시장에서 그 결과물을 선보이게 한다. 전시라는 이 행위에서 작가는 자신의 마음의 흐름과 동감하는 관람객도 만나고,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 해 주는 감상평을 듣기도 한다. 이번 전시가 정해진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에서 작가의 심리적 흐름에 공명(共鳴)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정효정
2016. 8 균형 연습 Balance Exercise, 갤러리 175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작업들은 『조각-그림』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그 전에는 작업 초반의 즉흥적인 붓 터치가 남긴 흔적이나 원, 타원 같은 본질적인 모양들, 무심하게 그어진 완만한 곡선과 기하학적인 선들에서 흥미를 끄는 요소를 발견하여 구조적인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과정 중에 지워지는 부분과 더 뚜렷하게 윤곽선을 갖는 형태가 생기는데 마치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듯 무계획적인 요소와 의도적인 요소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이번 연작에서는 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서 구조적인 형태를 더 강조하게 되었다. 하늘색 배경은 일정한 모양이나 부피를 갖지 않는 기체상태와 같다고 상정하였고 그와 대조적으로 녹색의 윤곽선은 밀도가 높은 고체의 물질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이라고 자주 느끼곤 하는데 그런 감상이 하늘색과 녹색의 반복적인 조합을 시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또 가장 자연의 색이라고 할 수 있는 녹색과 하늘색을 사용해서 자연적이지 않은 형태를 디자인 한다는 아이디어도 양면적인 부분으로 느껴졌다.

놀이터의 그네나 시소와 같은 구조물이 움직임에 대해 열려 있듯이 정적이지만 움직임을 암시하는 독립적인 구조( free standing construction)를 세운다는 느낌으로 그렸다. 이러한 서 있는 형태에의 도출은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다' 라는 명제의 변주(variation)이기도 한데 이는 시각적 조정 뿐만이 아니라 균형감각과 같은 신체적 감각도 투영되기 때문이다. 곧은 수직선 하나는 힘줄로 여겨지며 하단부의 수평선은 땅을 딛고 있는 발의 확장된 형태 또는 변형된 형태로 생각되어 진다. 앞으로 구조-물질-신체 라는 세 가지 큰 모티브가 회화의 표면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체 상태의 화면이 한편에서 대두되지는 않을지 작업 과정 속에서 즐겁게 발견해 나갔으면 한다.

■ 이민정
2014. 4 reminiscence Ⅱ, 플레이스막

몇 년 전, 한 평야를 지나다가 드문드문 세워진 거대한 원통형의 벽돌 건물을 봤다. 농사지을 때 이용한다는 그 건물은 마치 곡물 창고처럼 보였다. 그것이 실제 창고였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곡식이 들어차 있었는지는 논외로 하자. 탁 트인 지평선, 맑은 하늘, 넓은 들판.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건물을 보며, 나는 찰진 밥 한 수저가 입안에 가득 찬 느낌을 받았다. 침이 고여서 입맛을 다셨다. 이민정 작가의 작업실을 두 번째로 찾았을 때, 작업 중이던 작품 하나가 꼭 그랬다. 위 아래로 길쭉한 화폭은 반으로 나뉘어 깊은 청색과 붉은 갈색이 칠해져 있었다. 청색과 갈색의 경계 위에는 두 개의 기다란 '8'자 모양이 나란히 서있었다. 순간, 평야 위의 장면이 떠올랐고,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 그림이 좋아졌다.

대화 중 작품에 대한 호감을 표하자 잠시 후, 뭘 그린 것 같으냐고 작가가 물었다. 조금 망설였다. 곡물 창고 같아서 배가 부르고 입에 침이 고여요. 그래서 좋아요. 아무래도 '미학적'인 대답과 거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침이 고인다는 말은 빼고 적당히 에둘러 답을 했다. 작가가 말했다. 뼈를 그린 거예요. 그리고 사실, 지금은 저렇게 걸려 있지만 원래는 가로로 길게 걸어 놔요. 그날 대화는 추상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말하며 시작됐다. 추상화 역시 엄연히 상하좌우가 있기에 방향을 바꿔 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 터였다. 입이 바싹 말라서, 입맛을 또 다셨다.

지난 1월 말부터 여러 차례 이민정 작가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매번 작가와 작품을 오해했던 것 같다. 나의 무지 탓이 컸다. 이런 식이었다. 이야기를 쓸 때 작위적인 요소가 과해지면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던데, 그림을 그릴 땐 어떤가요. 혹은 작가님 그림을 보고 '무엇을 그린 거죠?' 라고 묻는 것은 결국 '잘못된' 건가요? 앞의 질문이 글과 그림(그중에서도 추상화)의 차이를 무시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면, 뒤의 질문은 화폭 속의 형태에 어떤 사물이 반드시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생각했던 내 강박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됐다.

아마 모든 답은 이번 전시의 제목 '상기하다(reminiscence)'에 들어있는 듯하다. 작가는 그리는 행위가 기억이나 추억 등과 같은 듯 다른, '상기(想起)'하는 작업이라 말한다. 그것은 (나는 이렇게 글로 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무엇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마음의 자화상' 쯤이 되는 것도 같다. 화폭 위에는 선과 색채의 연속이지만, 전시장 안의 공기 속에는, 작가가 상기해낸 마음과 정서의 켜가 가득하다. 운동선수들은 결정적인 순간, 몸에서 힘을 뺀다. 이번 전시의 관객에게도 필요한 미덕인 듯싶다. 뇌에 힘을 빼고, 심호흡을 하자. 그리고 그림을 본다. 긴장을 풀고, 느끼면 된다. 어떤 그림엔 아련한 봄날이 있고, 다른 그림은 무릎이 시리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서 미소가 번질지도 모르고, 전시장 공기에서 밥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입맛을 다셔도 된다. (서두에 언급한 그림은 전시 목록에서 빠졌다. 내가 오해한 탓은 아니라고 작가에게 확답을 들었다.)

한 소설가의 말마따나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고 주의를 기울여 다시 생각하고 또 오해하는 것이 삶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이다. 우리가 전시를 보고 느끼는 방법이다. 전시장 바깥의 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러 모로 이 계절에 정말 잘 어울리는 전시다.

■ 목승원
2012. 6 상기하다 reminiscence, 신한갤러리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 기억은 연대기적 시간의 방향을 따르지 않는다. 갑작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는 경우를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지 않은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은 사물, 상황, 오감이 비자발적으로 촉발시킨 기억의 반란으로 시작된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의 프루스트는 이 경험 안에서 삶과 수많은 관계가 기호들로 채워진 물음의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결정되지도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로 스스로 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이라고 프루스트는 얘기한다. 기억의 반란으로 익숙한 대상은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버리고 희미한 기억이 자신 앞에 등장한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떤 대상으로부터 기억의 흔적을 더듬는 사유의 과정으로 깊숙이 빠져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억의 흐름을 되짚어가기 위해서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정보의 단서들, 그 추상적인 움직임, 이미지, 색채 혹은 질감을 연상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치 방금 지나간 봄날의 훈훈함과 향기처럼 또렷하게 떠올려지지 않으나 온몸으로 감지되는 무언가를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민정의『상기하다』展은 기억에 관한 전시다. 갑자기 부상하는 어떤 기억에 관한 내적 경험을 작가는 단어 "상기 reminiscence"로 함축했다. 어렴풋한 기억이란 의미를 가진 "reminiscence"는 선험적 기억 또는 전생의 기억 같은 것으로 데자뷰 현상과 같이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지시한다.『상기하다』展은 바라보기보다 사색하는 그림을 경험하는 전시다.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첫 만남에서의 화가 이민정의 모습에서 '느려진 시간'이 연상되었다. 표현도 서툴렀다. 표정은 애매했다. 다소곳하지만 질문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마치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을 꼭꼭 담아놓은 저장소에서 질문에 알맞은 답을 한참이나 뒤적거려 꺼내는 듯했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자신이 내뱉는 단어를 꾹꾹 눌러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작업에 관해서는 특별한 창작의 원천도, 기술적인 특이함도 없다고 얘기하지만 한편으론 자기만의 세계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도 느껴졌다. 마치 언어에 의해 자신을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말을 아끼고 설명되지 않는 생각을 담아내려 했다. 그는 새로운 회화보다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려 한다. 작업의 개념이나 모티브 역시 불확실하게 보였다. 좀더 작업과정에 가깝게 다가가보자. 우선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형태인 점·선·면에 의해 탄생한 형태를 화면 위에 내놓는다. 시작의 형태들은 작업이 진행될수록 몇 차례의 변화를 겪는다. 확실한 개념이나 계획보다 우연히 나타난 형태들이 서서히 성장의 과정을 겪어가며 새로운 형태를 파생시키거나 지워지면서 화면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미궁으로 변해간다. 작가 스스로 그림의 모티브에 관해서 방임적이라고 한 것은 작업의 본질이 의도한 결과를 재현하기보다 세계(화면) 안에 던져진 형태(생명체-유기체)의 진화과정에 방점을 두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의도하는 세계의 재현을 추구하기보다 작업 과정에 따라 자신 앞에 어떤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은 직선과 곡선이 서로 만나 만들어내는 의외의 형태가 주는 유희이자 색과 텍스처는 다양한 지각의 경험을 일깨운다. 그림은 무게나 온도와 같은 지각의 장이 되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열린(또는 빈) 기억의 장으로 펼쳐진다. 보는 사람의 경험에 의해 그림은 무한의 기억을 발생시킬 수도 반대로 의미 없는 장이 될 수도 있다.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건 비정형적인 형태들과 여백뿐이다. 여백은 전체적으로 밝은 회색 톤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간헐적으로 얼룩들이 아른거린다. 얼룩은 시간의 흔적이다. 최초의 형태 혹은 모티브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서서히 배경으로 사라지면서 여백의 얼룩으로 남겨지거나 다시 되살아날 수도 있다. 마치 우발적인 기억의 등장이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기억으로 이동하는 발작적인 기억의 자율성처럼 여백의 얼룩은 그림의 탄생하던 시작의 기억을 품고 있다. 이민정에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커다란 밑그림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 한 점의 그림은 하나의 삶을 비유하는 듯하다. 마치 밀물과 썰물, 일출과 일몰의 주기적인 반복을 상기하듯 그의 그림은 한 화면 안에서 하루와 영원이 공존한다. 기억의 얼룩들은 먼 곳으로부터 기인한 여명처럼 '지금 여기'로 다가오는 중이거나 반대로 심연으로 사라지는 우주가 순환성을 담아내려는 흔적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에바 헤세의 중력을 따르는 설치조형작업은 현존하는 어떠한 개념이나 양식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를 좇았다. 그것은 늘 다른 중량, 다른 배치, 다른 기울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헤세의 조형세계가 어떤 언어로도 대체되지 않는 직관과 경험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점은 추상, 구상, 조각, 설치와 같은 언어가 실제 조형작업과 온전히 대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맞게 시사한다. 헤세의 현상학적 예술관은 시각에 머물렀던 미술에서 지각하는 원리의 미술로 확장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곧 사유와 직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조건부의 사유로 제한되며 실제로는 온몸으로 세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나의 광경은 그저 광경일 뿐 그 자체가 사유는 아니다. 지각의 경험은 사유 이전에 발생한다. 사유란, 지식의 체계에 따른 해석만으로 불충분하다. 우리의 지각이 자각으로 연장되려면 불가피하게 정신과 몸, 우주의 신비를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 메를로-퐁티는 "회화는 운동의 외부를 찾지 않고 그 비밀의 숫자를 캐묻는다"라고 말한다. 이민정의 그림이 흥미로운 것은 몸의 지각으로 인식하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데에 있다. 그는 그림의 표면을 피부, 살갗처럼 자주 표현한다. 온도에 대한 감각은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의 온도는 미지근함에 가깝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사이는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중간의 세계, 고원의 삶을 희망하던 이 철학가에게 중간색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으로 수평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내게 중간색의 모호함은 지워진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소리가 없음이 아니라 소리를 잠시 숨겨놓은 상태에 가깝다. 마치 수중처럼 육지와 다른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로써 추상회화는 언어가 가진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짓에 가깝다. 구조주의 인식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사적 인식이 결국 언어의 지배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는 결국 언어 밖으로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규범화된 언어를 해체하고 재배치하려는 시도는 시적 전복을 암시한다. 시적인 사유는 무질서가 아닌 질서 이전의 세계를 향한다. 원형에 다가가려는 의지는 모든 예술가의 바람일 것이다. 앞으로 이민정이 바로 그곳, 지나친 산업화와 자본화로 잊혀진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그곳을 향한 여정을 계속되길 바란다.

■ 정현